홈페이지 상위노출 [책과 삶]상상 (불)가능한 ‘미국 없는’ 세계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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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지정학>은 오늘날 세계질서가 서구의 전유물이라는 신화를 반박하며, ‘미국 없는 세계’가 반드시 혼돈과 붕괴로 귀결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책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통찰을 지난 5000년의 문명사를 되짚는 데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서구 주도의 세계질서를 ‘보편적’으로 보는 통념을 해체하고, 과거부터 다원적이었던 세계질서로부터 미래에 대한 단서나 가능성을 찾아보는 ‘과거로 돌아가는 미래(back-to-the-future)’라는 논지를 풀어간다.
책에서 사용하는 ‘세계질서’ 개념은 권력 구조, 경제적 연결, 정치 사상, 리더십이 상호작용하며 인류의 안정과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세계의 작동 방식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서구는 민주주의, 인권, 법치주의 등 현대 질서를 형성하는 주요 가치들이 서구만의 독창적인 발명품인 양 내세워 이를 기반으로 국제적인 힘을 쌓아왔다. 책에선 고대 근동부터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까지 수많은 ‘비서구’ 문명을 톺아보며 서구 중심적 편견을 깨부순다.
고대 근동 ‘아마르나 체제’부터동아시아 ‘조공 질서’ 등 다루며서구 주도의 세계질서 통념 해체다원적이던 과거 통해 미래 예측
미 중심 질서 21세기 후반엔 ‘흔들’소수 강대국의 ‘다극 체계’ 넘어글로벌 멀티플렉스의 세계 제시
이를테면 이미 기원전 14세기경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히타이트 등이 이른바 ‘아마르나체제’ 아래 정교한 외교 관계를 맺었고,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세계 최초의 평화 조약인 ‘카데시 조약’을 체결해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선구적 모델을 남겼다. 서아프리카 말리 제국의 ‘만뎅 헌장’은 일찍이 인권과 개인의 재산권을 명시했으며, 대륙 전역에 형성된 무역 네트워크가 아프리카만의 국제적 질서를 지탱했다.
한국이 익숙한 동아시아 ‘조공 질서’도 책이 소개하는 세계질서 중 하나다. 삼국시대 한반도 왕조와 수·당의 전쟁에서 보듯 조공 체계는 단순한 복속 관계로 볼 수 없다. “중국의 문화적·정치적 우위를 인정하는 국가들에 무역 특권과 외교적 승인을 제공하는” 위계적 관계가 핵심이다. 선도적 국가가 다른 국가들을 식민지화하지 않고 안보와 무역 혜택을 제공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세계질서가 조공 체계와 먼 친척뻘이라는 지적이 흥미롭다.
근대 서구 세계질서의 출발은 ‘30년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1648년 맺어진 베스트팔렌 평화 조약이다. 각 국가의 주권을 침해할 수 없는 원칙으로 확립한 이 합의는 현시대까지 세계질서를 뒷받침하는 외교 관계의 기초가 됐다. 하지만 익히 알다시피 이 평등의 원칙은 강대국 사이에만 균형을 만들었고, 제국주의, 인종차별주의, 노예제도와 같은 비유럽 세계에 대한 유럽만의 세계질서를 만들어냈다.
그로부터 패권을 넘겨받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자유주의적 세계질서’는 유엔과 같은 다자간 기구를 통한 세계질서 관리, 민주주의 촉진, 인권 옹호, 자유무역 등을 내세운다. 하지만 최근 트럼프 2기 행정부를 통해 다시 거론되는 먼로 독트린(19세기 서반구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미국 패권 정책), 베트남 전쟁과 이라크 침공 등에서 그랬듯이 미국은 언제든 자국 이익을 위해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때로는 독재자들과도 긴밀하게 결속했는데,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도미니카 공화국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에 대해 “그는 개자식일지 모르지만 우리의 개자식이다”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미국 세계질서는 냉전 종식과 소련권 붕괴로 절정에 달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을 통해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는 너무나 완벽하게 승리했다는 낙관주의를 펼치기까지 했다. 하지만 불과 20여년 만에 이러한 확신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2001년 9·11 테러에 이어 미국은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서 실패한 전쟁을 치르게 됐고, 동시에 중국은 세계질서의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했다.
책에선 미국이 로마제국처럼 붕괴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다만 미국이 자신들의 비전과 가치, 글로벌 협력기구의 리더십을 중심으로 구축한 세계질서가 21세기 후반이면 더 이상 지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중국에 대해선 서구가 두려움을 과장하고 있다는 지적과 더불어 세계 곳곳에서 반발에 부딪힌 ‘일대일로’에서 보듯 중국의 역량 자체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내린다.
저자가 제시하는 미래는 소수의 강대국이 패권을 다투는 ‘다극 체계’를 넘어선 ‘글로벌 멀티플렉스’이다. 관객이 취향에 따라 다양한 장르의 영화와 감독, 배우를 선택하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처럼 기업, 재단, 비정부기구 그리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훨씬 더 많은 행위자들 간의 상호작용이 벌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미국이 전략적 방위를, 중국이 무역과 개발을, 유럽연합(EU)이 기후변화 대응을 선도하는 식이다. 저자는 뉴진스, BTS 정국 등 K팝을 언급하며 한국과 같은 중견 국가가 문화적 다양성을 주도하는 미래도 제시한다.
저자는 서구 패권이 흔들릴 때마다 ‘세계의 종말’을 두려워하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사실 기득권의 편향된 입장에 불과하다고, 그 세계는 이전보다 오히려 나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한국에도 미래의 다원적 질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다른 상상을 제시하는 책이다.
충남 부여군 구룡면에 사는 윤옥희씨(65)는 지난 9일 자신이 51년 전 졸업한 용당초등학교를 찾았다. 용당초 5학년생인 윤씨의 큰손녀를 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이날 용당초에서는 6학년 학생 1명이 ‘최후의 졸업생’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졸업식과 함께 열린 폐교식에는 경기 남양주와 서울, 전북 익산 등 전국 각지에서 동문들이 찾아왔다.
용당초 재학생 10명 가운데 7명은 이달 말 11㎞ 떨어진 규암초로 전학을 간다. 규암초는 전교생이 436명으로, 부여군에 있는 초·중·고 가운데 두 번째로 큰 학교다. 학부모들은 “아이들이 두 번 다시 통폐합을 겪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11일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올해 3월 전국에서 60개 학교가 문을 닫는다. 지역별로는 경북 18곳, 전북·경남 각 8곳, 전남 5곳, 충남 6곳, 경기·대구 각 4곳, 부산 3곳, 강원·충북 각 2곳이다. 2016년부터 2025년까지 폐교된 학교 412곳을 더하면, 11년간 전국에서 472개 학교가 사라진 셈이다.
지역 인구 감소로 폐교가 늘어나는 현상은 흔히 불가피한 흐름으로 여겨진다. 교육부 역시 ‘적정규모학교’를 내세워 학교 통폐합을 유도하고 있다. 하지만 같은 인구소멸 지역이라도 학생 수 감소가 유독 빠른 학교에는 그 나름의 배경이 있다. 지역 사회에서 ‘약한 고리’로 인식된 학교일수록 통폐합의 대상이 되기 쉽다.
지난 5일 대구 달서구 월곡초에서도 제33회 졸업식 겸 폐교식이 열렸다. 이날 6학년 학생 23명이 졸업했지만, 지난해 1학년 입학생은 3명에 불과했다. 월곡초는 도보 15분 거리의 월촌초와 통폐합된다. 인근 월촌초와 상인초는 모두 학생 수 400명대를 유지하고 있다.
주민들은 월곡초만 학생 수가 급감한 이유로 조심스레 “영세민 아파트가 있다”는 점을 언급했다. 1994년 지어진 인근 영구임대주택 주민들이 월곡초에 배정되면서, 학교를 기피하는 분위기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 학교에서 9년간 학교 보안관으로 일한 A씨는 “아이들이 줄어드는 것도 맞지만 임대아파트 문제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며 “우리 며느리도 그런 이유 때문에 이 학교에 손주를 보내지 않겠다고 해 놀랐다. 학부모 마음이 그런가 보다”라고 말했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월곡초 폐교를 두고 낙후된 지역 탓이라는 자책과 상심이 교차한다. 월곡초 앞에서 18년간 문방구를 운영해온 B씨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영세민 아파트의 12평, 18평 소형 평수를 보면 장애인이랑 새터민,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산다”며 “분위기도 그렇고, (학교 다닐) 아이도 없는데 문을 닫아야지 어떡하나. 당장은 아니어도 앞에 있는 중학교, 고등학교도 모두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청소년들은 폐교 여파가 지역 전체로 번질 것을 걱정했다. 월곡초 폐교식에 참석한 인근 중학교 3학년 이준수군(16)은 “이 학교에서 우리 학교로 많이 입학했는데, 폐교하고 나면 학생 수가 줄어 결국 우리 학교도 결국 없어질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인구소멸로 폐교가 예견된 곳이라 해도 실제 폐교 과정은 종종 갑작스럽게 진행된다. 한 학기 전에서야 폐교가 확정되는 경우도 있다. 용당초 구성원들 역시 지난해 초부터 ‘통폐합 예정 학교’로 분류돼 각종 주민 설명회와 폐교 안내를 준비해왔다. 지난해 용당초에 부임한 임순옥 교장은 “100% 통폐합될 학교라고 생각하고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름방학을 맞은 지난해 7월 말, 교육청으로부터 ‘통폐합 유예 신청을 할 수도 있다’는 공지를 받았다. 용당초를 포함해 충남의 4개 학교는 폐교 예정 한 학기를 앞두고 큰 혼란을 겪었고, 용당초는 최종 폐교됐다. 임 교장은 “이미 주민들이 폐교를 받아들이고 마음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는데, 갑자기 유예할 수 있다고 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며 “교육 당국이 눈앞의 숫자보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소규모 학교 정책을 펴나가면 좋겠다”고 말했다.
경기·부산·충남·전남 등 4개 교육청은 내년 3월 폐교 예정 학교와 관련해 “아직 학부모와 지역 주민 의견을 수렴하는 중”이라 “내년도 폐교 예정 학교가 확정되지 않았고 추가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진 의원실이 17개 시도교육청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2027년 3월 폐교가 예정된 학교는 최소 10곳이다. 이 숫자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폐교 이후 관리 문제도 남는다. 폐교식을 마친 학교 교직원들은 다음 달 말까지 학교에서 이사 준비를 마쳐야 한다. 학교 자산 중 지역 내 다른 학교가 필요로 하는 물품은 넘겨줘야 한다. 월곡초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폐교 준비 작업을 했다. 졸업식 날에도 과학실과 정보실에는 지구본과 각종 전자기기에 인수해 갈 학교의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지난 8일 100회 졸업식을 끝으로 폐교하는 부여 충화초 부지는 지역 주민 자치 공간이나 요양병원·애견센터 등으로 임대되는 방안이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지역 주민 반대나 매각 어려움 등으로 5년 이상 방치된 폐교 부지도 적지 않다. 진 의원실 자료를 보면, 2016~2025년 폐교한 412곳 가운데 최근 5년 이상 부지가 미활용 상태로 남아 있는 곳은 156곳에 달했다.
안·성·기. 저의 형·선배·스승이자 신앙인으로 대부(godfather)이십니다. 지난 5일 영면했고, 9일 천상으로 떠납니다. 1985년, 젊은 배우와 새내기 영화 담당 기자로 만나 성기형과 함께한 40년을 반추해 봅니다.
<바람 불어 좋은 날>. 1981년 봄, 군 복무를 마치고 고향 마산에서 본 첫 영화입니다. 배우 안성기는 이 작품을 통해 만났지요. 이장호 감독의 스무 살 때 일기장 <모두 주고 싶다>도 이 작품을 계기로 읽었고요. 훗날 영화 담당 기자로 뛸 때 대화의 서두는 한동안 <바람 불어 좋은 날>과 <모두 주고 싶다> 였습니다. 한국 최초의 영화 홍보마케팅 전문 올댓시네마를 창립한 채윤희 대표(전 여성영화인모임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와의 오랜 인연도 이 일기장을 통해 맺었지요.
“너, 안성기 잘 알잖아.” “… 저는 잘 아는데 형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1985년 여름, 레이디경향 기획 회의 때 데스크는 제게 안성기 신혼일기를 받아오라고 했습니다. 아내 오소영 씨가 쓴 것이면 더 좋겠다는 첨언과 함께. 이후 저는 출근을 수유리에 있는 성기형 집으로 했습니다. 집 앞에서의 만남을 통해 청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지요.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고, 댁 전화번호도 몰랐으니까요. 얼마나 헛걸음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성기형을 통해 형수님이 원고지에 직접 쓴 신혼일기를 받아 들고 사옥으로 향하면서 싱글벙글했던 기억은 생생합니다.
돌이켜 보면 성기형과의 인연은 각별했습니다. 성기형이 저의 초청을 들어주기 위해 CF 촬영 시간을 조정했던 일화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1996년 10월, 경향신문 창간 50주년 기념 리셉션을 앞두고 저는 편집국 문화부장님의 엄명을 받았습니다. 리셉션에 당대 최고 배우 안성기·강수연이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겁니다. 데스크는 다른 분이었지만 말씀은 동일했습니다. “친하잖아….”
강수연님과 먼저 통화, 참석하겠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강수연님은 맺고 끊음이 분명해 이 한 번의 통화로 걱정을 붙들어 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기형은 참석이 어렵다고 했습니다. 같은 시간에 삼성 애니콜 CF 촬영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불가항력, 눈앞이 캄캄한 가운데 한 두 마디가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습니다. “섭외도 기자의 능력인데, 출판국 레이디경향에서 신문 편집국로 발령받은 뒤 처음으로 부담을 느낀 일인데” 운운한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성기형은 10분쯤 뒤에 다시 전화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 10분이 왜 그리 더디 가는지, 하지만 기다림의 끝은 달았습니다. 성기형이 광고대행사에 전화, CF 촬영 시간을 조정한 겁니다. “참석할게.” CF 팀에는 죄송했지만, 성기형의 남다른 배려심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마 영화 담당 기자들은 모두 이런 기억을 제각각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느라 성기형이 얼마나 힘들고 바빴을는지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저는 2012년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대부가 되어 달라고 전화했을 때 성기형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견진성사를 받지 않아 대부를 할 자격이 없다면서. 신부님께서도 안 된다고 하시자, 저는 형이 견진을 받은 뒤에 세례를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은 대부를 먼저 하고 가급적 빨리 견진성사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형은 약속을 지켰고, 훗날 제 견진성사 때에도 저의 대부가 되어 주셨습니다. 비둘기가 나는 십자가상을 선물로 주셨지요.
성기형의 마음 씀씀이는 CF 촬영 건보다 먼저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영화 <태백산맥>(1994) 촬영 때 일입니다. <태백산맥>에 저는 김병재·이창세·송용덕 등 선후배 기자들과 북한에서 내려온 보성군당 간부로 출연했습니다. 벽제 세트장에는 성기형도 와 있었습니다. 형은 민족주의자인 중학교 교사 ‘김범우’ 역을 맡았는데 이날 촬영이 없었습니다. 조감독의 착각으로 성기형이 늦잠을 잘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를 날렸다고들 했습니다. 형님이 화가 많이 났겠다고 생각했는데 정반대였습니다. 저희를 도울 일이 있을 수 있다면서 돌아가지 않고, 촬영을 마친 초저녁까지 기꺼이 저희들과 동행한 겁니다.
저는 <태백산맥> 외 <축제>(1996) <박봉곤 가출 사건>(1996)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1998) <취화선>(2002) <라디오스타>(2006) <부러진 화살>(2011) <주리>(2012) 등 성기형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한 바 있습니다. 촬영 중 성기형에 대해 들은 일화는 너나없이 “그런 배우 없다”는 말로 시작하거나 마쳤습니다.
<취화선>에서 성기형은 주연인 장승업(최민식)이 아니라, 어린 장승업을 구해주고 그림 재능을 발견한 조력자 ‘김병문’역을 맡았습니다. 작고한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는 주연이 아니라 조연인 데에다 많지 않은 출연료를 받고 한국 영화 발전을 위해(훗날 칸영화제에서 감독상 수상·한국 영화 최초) 기꺼이 동참해 준 배우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당시 영화 담당 기자들은 모두 알고 있는 일화입니다.
재밌는 일화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시절>(1998)을 호남의 한 지방에서 촬영할 때입니다. 우천으로 촬영이 취소되는 바람에 스태프들은 휴식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촬영 팀원들의 숙소에 성기형이 커피를 시켜줬습니다. 커피를 가져 온 직원에게 일행들은 기념으로 사인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는 빨리 빈 잔이나 돌려달라고 했답니다. 일행이 성기형을 가리키며 정말 모르겠느냐고 했고, 그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가 돌아간 뒤 일행은 성기형에게 섭섭하지 않느냐고 물었고, 돌아온 답에 고개를 끄덕였답니다.
“그건 그만큼 내가 연기를 잘했다는 것이잖아. 극 중 안성기하고 이 방의 나하고 연결이 안 되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안성기가 아니라는 거 아냐. 그렇지 않아?”
한 영화인은 상대방을 배려했던 성기형의 행동들에 대해 “마음이 움직이니까 몸이 시간을 낸 것”이라고 하더군요. 박중훈은 최근 낸 수필집 <후회하지마>에서 성기형에 대해 “세상에 마음속 깊이까지 다 겸손한 사람이 과연 있을까?”라고 존경심을 표했습니다.
성기형이 돌아가실 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자못 궁금합니다. 빙긋이 지은 미소 속에 과연 어떤 말씀을 하시고 계셨을는지? “나뭇잎이 되라, 놓을 때가 되면 우아하게 떨어지는”이라는 한 시인의 시구(詩句)가 떠오릅니다. 성기형의 한결같은 평화와 영원한 행복을 기원합니다.
배장수(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부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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